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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서양미술] 시대별 미술사조 - 중세 (초기 기독교 미술, 비잔틴 미술)

by 너진지 2023. 7. 5.
중세 미술

중세 미술은 크게 4가지 양식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미술, 비잔틴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 미술. 오늘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비잔틴 미술’까지 다뤄보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 미술

흔히 중세 미술 하면 ‘신(神) 중심의 인간관이 지배했던 시기’라 말하기도 하며, 현대로 와서는 ‘예술의 암흑기’라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중심으로 예술을 발전시켜 갔던 고대 미술(그리스 미술)과는 다르게, 중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 유럽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유럽 사회에서 크리스트교 교회가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죠. 크리스트교가 이처럼 사회를 장악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존재하였는데, 당시 로마는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26번이나 황제가 바뀔 정도로 짧은 즉위 기간과 이후 빠르게 교체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게 됐고, 현실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기 힘들었기에 진정한 행복은 사후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바로 '내세 신앙'인인데요. 말기 로마에서는 이러한 내세 신앙을 내세우는 종교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크리스트교도 이때 생긴 종교 중 하나였는데, 다른 사교들보다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종교로 부흥하며 유럽의 중심 종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크리스트교가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정치적 사회적 건축과 예술 무학 모든 문명이 인간 중심이 아닌 신(神)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미술 역시 종교적 색채가 진해졌는데, 모든 작품이 암묵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종교와 관련이 있다 보니, 작가의 개성은 드러낼 수가 없었으며 감정적인 표현이나 색채는 최대한 배제되었습니다.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던 그리스 미술(고대 미술)과 완전히 대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미술은 암흑기로 평가받을만해 보입니다.

 

비잔틴 미술

4~5세기에 걸치는 서로마보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미술이 비약인 발전한 미술로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자이크이콘화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모자이크

모자이크의 재료는 대리석이나 유리 조각이었으며, 인조 유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다양한 색채를 가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로마 시대 때에도 모자이크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개인 주택의 마루를 장식하던 로마와 달리 비잔틴 미술은 교회의 돔이나 제단 뒤 같은 곳에 설치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의 예배 장소는 고대의 신전을 본뜬 것이어서는 안 되었는데요. 왜냐하면, 그 기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대 신전의 내부는 흔히 신상(神像)을 모셔놓은 작은 성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사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사제(司祭)가 미사를 드릴 높은 제단과 설교할 강단 한 곳에 모일 넓은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양식(비잔틴)의 예배당들이 지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교회의 내부 장식에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내부 장식을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조각에는 한결같이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회화는 이교도들이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상기하도록 도와주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 주므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라틴계 사람들은 주로 이러한 견해에 동의했고 6세기말의 교황인 그레고리우스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마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림책이 필요한 것처럼 형상들이 필요하다”라고 설득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모자이크를 이용해 교회 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시작된 모자이크화는 발전을 거듭해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의 교회에 보급됐습니다. 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모자이크는 점차 로마에서 동방으로 옮겨갔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비잔틴 미술의 한 양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콘

이콘(icon) 역시 비잔틴 미술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이콘은 성자나 성자의 가족을 주제로 그려졌으며 이러한 그림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작품은 그림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으며, 또 다른 작품은 향기가 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와 일반 가정은 물론, 황실에서도 이를 귀하게 다루었는데요. 메시지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관례적이고 양식화된 표현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왼손에는 복음서를 지니고, 오른손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표현하는 판 토크라 토르 형태의 그리스도상이 대표적인 이콘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판 토크라 토르란 만물을 지배하는 자 혹은 전능한 자라는 의미이죠. 이 밖에도 성자 혹은 석가족이 그려지는 경우 대부분 엄숙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큰 눈을 하고, 후광을 두른 것이 특징입니다.